직장인 점심시간
직장인은 피곤합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시간 정도는 아니지만
그것보다 사알짝 늦은 시간
알람 어플과 신경전을 벌인 끝에
겨우 겨우 일어나 5분 만에 준비하고 튀어나갑니다.
그렇게 역으로 가면
매일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지만
매일 지독히도 똑같이 풀방인
아주 신기한 교통수단을 타고 갑니다.
한 50분쯤 가는데, 기대하는 자리는
꼭 내리기 두 정거장 전 쯤에 생깁니다.
하지만 그것도 감사히 여기고 앉아
무사히 사무실에 도착합니다.
아직 뇌가 일어나기 전부터 약 3시간 정도 앉아있으면
점심시간이 됩니다.
제법 행복한 시간입니다.
각자 자유롭게 시간을 보냅니다.
부족한 잠을 채우기도 하고
밀린 업무를 메꾸기도 하며
원하는 사람과 히히호호 맛있는 걸 먹고
한 손에 아아를 들고 돌아오기도 하죠.
그렇게 돌아오면, 이제 퇴근까지는 5시간만 남습니다.
9 to 6의 허리를 야무지게 짤라먹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낙이라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직장인 점심시간
저도 지난 글에서 밝힌 것처럼
점심시간을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밥을 먹으며
사무실에서 생긴 답답함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난 글 말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좋은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등판한 청구인과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얄미운 시간에 걸려온 전화로 콜배를 뜨기도 합니다.
(대충 싸웠다는 말)
근데 이런 걸로 징징이를 할 순 없습니다.
그런 케이스 자체가 많지 않기도 하고
나랏돈 받는 입장에서
국민 응대는 사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빡칠 순 있어도, 현타는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의 경우, 그것보다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참 현타를 많이 느꼈습니다.
밥 친구
여기다 똥글을 남기다 보면
처음 배치를 받은 과에서 몇 가지만 좀 달랐으면
내가 지금 어디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
인간관계도 첫 인상이 중요하다고 하듯
직장 생활도 초반이 참 중요할 텐데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면에서 정이 좀 털렸습니다.
이번 글은 밥 시간 얘기니까
밥 관련 얘기만 하겠습니다.
처음 배치받은 과의 과장님은
점심 식사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과처럼
과장님과 과원들이 우르르 구내로 몰려가서 먹는 경우는
솔직히 거의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개꿀이라 하겠습니다.
그럼 자유였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 보스 형님이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저희 사무실 옆에는 국장실,
그리고 그 옆에는 본부장실이 있었습니다.
국 내 선임과인 저희 과에서는
무려 그 본부장님의 밥 친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본부장님이 약속이 있는 날은 자유지만
별 약속이 없으면, 저희와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9할이 구내였고, 나머지는 외식이었죠.
그 시간은 짬 있는 과원들에게도 당연히 편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어디 나가서 먹을 때는 가오를 살려 드리려 과원들이 많이 참석했지만
구내에서 먹을 때는, 대부분 피하려 했습니다.
다들 없던 약속을 주로 만들어서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밥 친구는 주로
5급 승진 가시권의 형님, 저의 사수
그리고 저였습니다.
태산같이 버텨주던 그 형님, 제 사수도 약속이 있는 날엔
홀로 본부장님과 구내 식당을 가기도 했습니다.
본부장님은 어디 뭐 중소기업 3, 40대 본부장이 아니라
감사원 사무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분입니다.
롤로 따지면 18렙(만렙) AP말파이트와
1렙 서폿 애쉬의 만남
뭐 대충 그 정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보통은 상급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헛소리도 해대면서
최대한 사회성이 있는 척 하지만
그 분과는 너무 짬 차이가 많이 나는 관계로
그냥 얌전히 밥만 먹고 오는 편이었습니다.
불편했습니다.
그분도 분명 편하지 않았을텐데,
왜 계속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분과만 먹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 본부장, 그리고 그 다음 본부장
3대에 걸쳐 밥 친구가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본부장실 비서분께 찾아가
오늘 식사 어떻게 하시는지…
묻고, 때론 기뻐하고, 보통은 실망하는 게
참… 그랬습니다.
산책 동무
밥만 먹고 돌아오면 그나마 낫습니다.
보통은 산책이랑 연계됩니다.
감사원 1별관 뒷쪽에는
삼청공원이랑 이어지는 쪽문이 있습니다.
점심시간 루틴은 밥을 먹고, 그 공원을 돌고
밖으로 나가 원 정문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가끔은 딱 요 며칠 날씨 정도 되는 날에
경복궁까지 갔다 오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제 겨드랑이는 그냥 통곡을 했습니다.
즐겁고 편한 산책이 아닙니다.
대부분 침묵을 지키며 묵언 수행으로 걷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시면 충분할 것입니다.
너무 그러면 곤란하기에
제가 쥐어짜내서 그 당시 핫하던 주식 얘기까지 한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용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생명력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
나름 트라이를 한 것 같긴 하네요.
지금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일부 야망러 기질이 있으신 분들은
와 1급이랑? 개꿀아냐?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딱히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1급은
이제 곧 나갈 분이시거나, 더 올라가실 분인데
전자의 경우는, 좀 차갑지만, 그래서 별로 의미가 없고
더 위로 올라가시는 경우에도
제가 너무 신입이기 때문에
솔직히 어떤 정성적 혜택을 보기가 어려울 겁니다.
업무와 연계가 된다면 모르겠으나
솔직히 저의 업무를 그 분이 신경쓰실 일이 거의 없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게 그렇게 개꿀이었으면
다른 과원들이 이 악물고 약속을 잡아 그 자리를 피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그 시간을
‘순수하게 불편하기만 한 자리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끔 참 야속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어요.
그 점심 시간이 너무 싫어서
어느 날은 저도 약속 있다고 하고 동기랑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과원 한 분과 본부장님이 식사를 가고
저는 사무실에 남아, 동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습니다.
근데 동기는 과에서 수석 한 분이 식사를 혼자 하실 것 같다고
구내가야 할 것 같다고 파토를 냈습니다.
동기에게 섭섭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 친구가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서
매점에서 만나, 대충 때우고 커피 한 잔 들고
원내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근데 본부장님을 만났어요.
하시는 말씀이
ㅁ감사관, 약속있다는게, 이거였어?
정확히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약속이 꼴랑 동기랑 약속이었냐 이 뜻이었겠지요.
뭐 그 당시에는, 쭈뼛쭈뼛 허허 네 허허 하고 넘기고
그 분이 가신 다음
동기랑 그 분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 웃으며 넘겼습니다.
(대충 “회사 생활 레전드 ㅋㅋ” 이런 느낌으로)
근데 그날 이후로 그 분이
이제 혼자 드신다고 하시더라구요.
솔직히 그때는 엄청 좋기만 했습니다.
자유였으니까요.
(다음 본부장님 오시기 전까지)
근데 시간이 지날 수록, 참 부질없다는 생각밖에 안들더라구요.
그 동안 한 건 뭐였을까
나도 동기처럼, 과 수석님이라도 챙기는 마인드로 가는게 맞았을까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부진정 자유
사실 위에 쓴 것들은
솔직히 제가 마이웨이로 갔으면
아쉬울 것도 없고, 짜증나는 것도 없었을 상황들입니다.
근데 그러지 못했죠.
저도 속 깊은 곳에 바라는 것이
아예 없진 않았나 봅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제 스스로도 현타를 느낀 것 같기도 하구요.
저를 아시는 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좀 어리둥절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나마 MZ력을 많이 발휘한 편이었거든요.
과장님의 번개 콜을 거듭 거절하는 등
맹목적으로 ‘완벽한 사회생활’을 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뭐 다 본인 느끼기 나름이라
내가 느낀 것과 그들에게 보이는 건 다를 수밖에 없겠죠.
저는, 뭐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 생각합니다.
입사 초반, 아직 업무에 적응을 하기 전에
제 동기들에게는 ‘가끔’ 있어 ‘기꺼이’ 갈 수 있던 회식이
저에게는 주 3회, 4회 있던 적도 많이 있었는데
저는 거기서 한 두 번 빠져나오면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느꼈습니다.
그런 일들이 거듭되며, 조금씩 지쳐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씁쓸하긴 하네요.
아무튼 저에게는 일에서 의미를 찾기 힘든 상황에서 해야했던
그런 밥 친구, 술 친구 같은 일상적인 소소한 의무들이
직장에서의 자기효능감을 앗아가는데
상당부분 기여한 것 같습니다.
감사원 지원을 고려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너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모든 과가 술자리가 빈번한 것도 아니며
점심시간마다 시다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저도 꼭 저런 이유 때문에 퇴사한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좀 더 비판적으로 보시면
인터넷에 흔히 있는
어느 피해망상 환자의 푸념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거구요.